‘사이(between)’에서 아직 오지 않은 예술을 표상하다
임성훈(성신여대, 미학)
예술은 감각에서 출발하지만, 그 감각이 지각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지성과 관련된다. 예술은 인간 정신활동의 산물이라는 널리 알려진 말도 예술이 단순히 감각적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영역에 관계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술의 감각적 주관성은 언제나 주목되어야 하지만, 그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인식적인 것과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논리적 인식이 아니라 예술의 영원한 고향인 감각적 주관성이 충분할 정도로 고려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예술적 인식에서 인과성이란 없다. 예술의 원인이 감각인지 아니면 사유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또한 예술 그 자체가 단순히 결과도 아니다. 예술, 감각 그리고 사유의 관계들은 합목적성이나 인과성의 관점을 떠난 미적 결합성에서 형성된다. 권오상은 이러한 관계들에 얽혀있는 여러 예술적 문제들을 다층적이며 복합적으로 연구하고 작업하는, 이른바 학구적인 작가이다. 국내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3D 애니메이션을 연구한 후 다양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취득하기도 했다. 작업과 더불어 지난 몇 년간 푸코, 라캉,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의 텍스트를 사유하면서 중요한 미학적 주제, 예컨대 시각성, 응시개념, 미디어 작품의 존재론, 시뮬라크르 등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권오상의 작업을 파악하거나 감상할 때 이러한 지적 작업이 지나치게 앞서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터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지적 작업은 조형언어를 위한 것이지 지적인 담론을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지적 사유들의 영향을 받고 때론 영감을 얻기도 하는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그 작업을 두고 단순히 ‘사유를 하는 작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작업을 하는 사유’라고 해야 더 적절할 듯 싶다.
권오상의 작업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존의 시각 예술에 나타난 이미지의 습속에 대한 의문 제기이다. 물밀듯이 제시되는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의 범람일 뿐, 그러한 이미지는 예술에 대해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습관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예술가의 목적이나 목표에 따라 설정된, 그저 좌표화된 이미지일 뿐, 예술은 아닌 것이다. 시각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비판은 시각을 더욱 메타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오감 중에서 시각은 특히 지적인 것과 많이 연관된 감각이다. 문화사는 시각의 우위성을 증명하고 있다. 시각은 여타의 다른 감각에 비해 왜곡이나 조작이 매우 용이한 감각이다. 작가는 이러한 시각의 헤게모니에 따른 위험성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지가 어떻게(how) 드러나는가를 넘어 무엇으로(what) 있는가, 곧 이미지의 존재론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그 이미지에 있는 무엇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무엇은 이미지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 등과 같은 물음은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의 미디어 작업에서 이미지는 기존의 예술론에서 논의되어 온 재현, 예컨대 모방으로서의 재현, 추상으로서의 재현, 또는 생각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재현의 이미지와는 달리 아직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사이(between)’에 머물러 있는 이미지이다. 권오상의 작업 세계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 들자면 그것은 바로 ‘사이’이다. 예컨대, 사물과 이미지 사이, 언어와 이미지 사이, 사유와 이미지 사이, 조형적 공간에서 촉발되는 사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적 감응의 절대적 공백 그 자체에서 현시되는 사이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사이’는 어떤 식으로 특별히 규정된 의미를 지시하는 말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에서 흔히 언급되는 틈이나 균열 등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저 문학적인 비유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해지는 그런 ‘사이’도 아니다. 작가 권오상의 ‘사이’, 그리고 이를 통해 추구되는 ‘사이의 미학’은 기존의 이론적 틀로는 규정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작가에게 ‘사이’는 니체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가치의 전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용어이자 작업의 개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해다』의 “세 단계 변화”에서 사자가 용에게 대적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사막 한 가운데 존재하는 옛 관습과 체제의 강력한 주인은 바로 용이다. 용은 모든 가치가 다 정립되었는데 왜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자 하느냐고 사자를 윽박지른다. 용은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고 복종할 것을 위협하듯이 주문하지만, 사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맞선다. 마침내 사자는 용을 제압하고 자유 정신을 위한 새로운 가치를 쟁취한다. 권오상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사자와 같은 태도로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기존의 예술 체제로는 그리 잘 설명될 수 없고,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도 없는 과정의 연속에서 이루어진다. 목적은 홀연히 사라지고 ‘사이’만 그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다. 목적에 따라 반복적으로 작업을 계속 하기만 한다면, 도대체 그 작업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술이 목적지향적이라면 도대체 예술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술은 본래적으로 무목적적이다. 그러기에 예술가는 제작자로서의 장인과 다른 것이고, 예술작품은 목적 지향적인 수공업적 제작물과는 다른 것이다. 작가에게 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사이’이다. 그리고 ‘사이’는 아직 오지 않은 예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표상하는 미학적 기표이다.
권오상의 미디어[매체] 작업은 이러한 사이의 미학에 오리엔테이션된 것이기에, 미디어는 단순히 작업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예술의 존재방식에 연관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가 매체를 다루는 방식은 특별하다. 매체를 활용해서 작업한다는 차원을 넘어 매체를 통해 지금까지 설명될 수 없었고 재현되지 못한 세계, 달리 말해 어떤 식으로든 규정될 수 없었던 세계를 이미지로 표상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는 어떤 것인가? 그렇게 이미지로 표상된 그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인가? 실상 그 세계는 감지되고 알 것도 같은 세계인 듯 보이지만, 끝내는 이해될 수는 없는 그러한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철저하게 메타적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표상하고, 그리고 또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표상한다. 이렇게 표상된 이미지는 결국 사이의 이미지이다. 보이는 것이 무조건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드러내고자 인위적이고 도식적인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그 사이에 나타난 이미지의 표상은 이중적으로 중첩된다. 그런데 이렇듯 중첩된 것조차도 어떤 규정된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과정으로만 감지될 뿐이다. 그러기에 권오상의 미디어 아트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도상이나 상징적인 것들은 무엇에 대한 지시이거나 어떤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감상자의 마음에서 무한히 변용되는 이미지의 표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작가 권오상은 자신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사물, 언어 그리고 이미지의 관계를 묻고 있다. 실상 이러한 물음은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물음과는 다소 차별화되는 물음, 그러니까 ‘사이’의 관점에서 던져지는 물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이’는 사물, 언어 그리고 이미지의 관계를 단절시키기도 하고 통합시키기도 한다. 관계들은 끊임없이 분열되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면서 언제나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러한 사이에서 비롯되는 관계들의 항뿐이다. 사이는 관계들 속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 이빨에 낀 이물질처럼 늘 짜증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가 있기에 역설적으로 그러한 관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2010년도 이전의 초기 작업들은 한편으로 즉물적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개념적이기도 해서 작가가 추구하는 ‘사이의 미학’이 온전히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작가의 생각이 너무 앞서 조형적 감각의 요소가 내용과 형식에서 다소 억눌린 측면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사물, 언어 그리고 이미지의 관계들을 사이의 미학의 관점에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부단한 시도들을 충분히 읽어낼 수는 있다.
‘사이의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커다란 전환점은 무엇보다 2010년대 초반의 작업에서 이루어진다. <of other spaces> 연작을 보자. 이 연작은 공간(작가는 공간에서 장소 개념 또한 포괄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듯 보인다)에 대한 조형적 감응을 다양한 이미지의 표상으로 보여준다. <of other spaces>, 곧 ‘다른 공간에 관하여’인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다른 공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미지에 나타난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공간이란 말인가? 감상자인 우리는 작품의 이미지에서 어떤 공간을 보는가? 우선 ‘다른 공간’에서 ‘다른’은 어떤 속성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 해석 또는 이해가 달라졌다는 것을 지칭하는 듯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다른’은 어떤 익숙한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이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익숙함이 익숙함 그 자체로 있기만 하면, 익숙함은 그 익숙함이라는 피상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익숙함은 ‘다른’ 익숙함을 통해 파악될 때, 오로지 그럴 때에만 그 익숙함은 본질에 호응하는 계기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공간에 관하여’란 공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이다. 권오상의 작업에서 공간 개념은 중요하다. 그런데 과연 공간이란 무엇인가? 이미지로 표상된 그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마음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공간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가 보여주는 공간은 물리적으로도 형이상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공간이며, 심지어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예컨대 네거티브 공간이니 포지티브 공간이니 하는 그러한 조형적 공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감상자에게 온전히 파악되는 공간인가? 그렇지도 않다. 공간은 그저 공간일 뿐이고, 그러한 한에서 본질로서의 공간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공간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점유되거나 분할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다.
공간(space)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공백(void)으로 넘어간다. 권오상의 <void> 연작을 이해하는데 있어 앞서 언급한 공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void>는 ‘다른 공간’이라는 계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본질, 달리 말하자면 진리의 문제를 조형적으로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연작이다. 공백은 그래도 어떤 계기라도 설명할 수 있었던 공간과 달리 어떤 식으로든 표명될 수 없는 것이다. 공백은 표명되자마자 더 이상 공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void>는 공(空)이다. 권오상은 <void> 연작에서 공백을 조형적인 표현가능성이 아니라 표현불가능성의 차원으로 이끌어간다. 여기서 ‘사이’로서의 공백은 가상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어 현시된다.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가상은 예술의 논리이다. 가상으로서의 이미지 공간에서, 나아가 공백에서는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러기에 작품에 재현된 이미지는 현실의 이미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상적이거나 상징적인 이미지도 아니다. 공백은 가상으로서의 진리의 공간이자 장소이다. 헤겔은 가상이 본질에 본질적이라고 말하면서 가상이 아니라면 진리가 현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은 권오상의 작업에 그대로 상응하는 것이다. 가상의 진리로서의 공백은 어느 곳에도 없고, 또한 어느 곳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절대적인 공백에서 심미적인 감응이 촉발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백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다층적인 조형적 결들로 형성된 감각의 층위가 현전한다. 그러나 공백에서 표상된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존을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결국 공백으로서 부재를 위한 이미지들이다. 이미지의 현재성은 곧 바로 이미지의 부재성으로 이어진다.
공백에는 어떠한 표지판도 세울 수 없다. 장소와는 달리 중심도 없고 방향도 없다. 또한 어떤 영역을 설정할 수도 없다. 공백은 현존하면서 동시에 부재하기 때문에 말해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또한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런데 공백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공백은 작가의 작업을 근본적으로 견인하는 힘이다. 이 힘은 어떤 면에서 숭고한 것과도 연관된다. 숭고란 본디 우리의 상상력이나 지성으로 포착되거나 파악될 수 없는 것에서 촉발되는 마음의 이미지와 연관된다. 공백에서 이러한 숭고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표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표상된 것은 표상된 것으로 인식될 수 없고 표상될 수 없다는 것으로 체험된다. 공백은 무엇이 현시될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그 무엇도 현시될 수 없는 공간이다. 공백은 프로이트 식으로 보자면 무의식의 심연인 듯도 보이고,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감각적인 세계에서 저 이데아적인 본질 세계로 이어지는 진리의 통로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공백은 심연도 통로도 아니다. 공백은 그저 공백일 뿐이다.
<void> 연작은 <void_state of exception>, <void_gaze>, <void_event> 등으로 이어진다. 공백은 생각은 할 수는 있으나 그 무엇으로도 인식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은 우리의 삶, 세계 그리고 실존과 밀접히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관성이 없다면 그 공백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있는 공백이 아닐뿐더러 예술의 공백이 될 수도 없을 터이다. 그러기에 공백은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예외의 상태로 존재하거나 시선을 넘어 보여지는 응시의 세계 또는 단일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성으로 현시된다. 이런 점에서 <void> 연작은 공백이라는 계기를 통해 드러나는 감각적 층위를 제시하고 있다.
권오상은 장소, 공간, 공백 등을 주제로 한 작업을 통해 ‘사이의 미학’을 보여준다. 다양한 기술매체와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여 가상공간에 이미지를 모델링하고 다시 해체하는 시물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실상 이 작업은 무엇으로 규정되기 어렵다. 최종 결과물은 사진의 형태이지만, 그 모든 점에서, 특히 ‘사이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간단히 사진으로 정의될 수가 없다. 가장 일반적인 범주로서의 미디어 아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떤 관점에서는 설치미술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진예술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 어떤 식으로 보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권오상이 특별한 기법이나 참신한 새로운 형식에 몰두해서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무엇보다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작품에서 미학적 감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가의 문제이다. 특히 2022년 최근의 <void_event> 연작을 보자. 사건성이 주제로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시된 이미지에는 어떠한 사건성의 표상도 없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가? 공백, 그 사이에서 사건은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작가의 마음에서도, 감상자의 심상 속에서도 더군다나 작품의 이미지에서도 사건성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백, 그 ‘사이의 미학’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그 모든 것에 있다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백에서 환기되는 그 모든 것, 그 사이에서 사건성은 순간의 불꽃처럼 현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건성이 이미지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연속되는 어떤 장면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건은 오롯이 사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점을 시야에서 놓쳐버린다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이의 미학’을 충분히 떠올린다면 왜 이 장소, 공간, 공백에 초대되었는지, 그리고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돌아갈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
권오상은 기술매체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이며, 기술매체가 현대예술의 향방을 가늠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계기인지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 기술매체를 통해 예술의 자유와 표현가능성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예술은 문화 속에서 존재하지만 언제든지 그 문화를 깨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예술은 아직 오지 않는 것을 늘 표상한다. 권오상은 “공간(space)”[장소]에서 그리고 또한 “공백(void)”에서 비롯되는 ‘사이의 미학’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통해 미디어 미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가능하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새로운 예술작품의 존재방식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예술의 체계는 그의 이러한 작가 정신과 작업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