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 이건용 (군산대 교수, 전위미술가)
어린시절 고향에 대한 감회는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다. 그것은 잦은 이사와 전쟁으로 오래도록 한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은 황해도 사리원이지만 세살 때 38선을 넘어 서울에 와야 했던 것은 어머님이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고, 더구나 해방이 되어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때 사리원에는 친할머니가 혼자 남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당시 양의사였는데 친척이 사는 마을에 열병이 돌아 친척은 물론 온 마을사람들을 모두 살리고 혼자 열병을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목사가 되신 것은 할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성경책을 발견하시고였다.
이렇게 할아버지의 무언의 유언을 따라 목사가 되신 아버님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교회 하나를 개척하셨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일본인 적산가옥 독채에 살았는데 주인집은 윗채에 따로 있었고 그 중간에 방공호와 큰 창고 하나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창고 안에서 일본인들이 쓰던 철모와 배낭, 쇠칼, 군화, 물병 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여섯 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지만 이것들이 전쟁에 사용된 물건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오리와 토끼, 또는 양들을 키우면서 재미나게 살았고 드디어는 내 나이 여덟 살에 청량리 근방에 기와집 하나를 구입해 이사를 하였다. 내 집을 마련한 우리 식구는 기뻤지만 얼마 후 6·25 가 터졌다. 어느날 갑자기 무수히 퍼붓는 총소리가 들렸고 길거리가 온통 피난민으로 가득하고 그 대열에 우리도 끼었다.
아버님은 목사였으므로 미리 피신하셨고, 광나루에서 식구들이 합치기로 했다. 이때 걸어가다가 총알에 맞아 피를 흐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머니 등에 업힌 여동생, 어려서 잘 걷지도 못하는 남동생, 그리고 나와 어머니는 무사하였다.
광나루 옹기 굴 속에서 생활하는 것도 잠시, 인민군들이 마을을 장악하고 피난민들을 파악해가자 아버지 때문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외가로 살만한가 살피러가고 어머니와 동생들만 광나루에 남게 되었다. 당시 교통이 어려운 사정이어서 아버지와 나는 수원을 거쳐 외가인 경기도 사강까지 도보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쉬었다가 가곤 했는데, 한번은 다리를 몹시 다친 사람이 풀섶에서 대롱을 꺾어 자신의 허벅지의 상처에서 구더기를 골라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외가에서 내가 체험했던 일들은 나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 중에는 사람의 팔과 다리가 나온 채로 생매장을 한다든지,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몽둥이로 사람을 패서도 숨이 남아 있으니까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장면은 이제 세상이 끝장난 것만 같았다.
결국 우리 식구는 제주도까지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해서 간 곳은 큰 교회 안을 군용담요로 칸막이를 친 수백 명이 들끓는 피난민 수용소였다. 이런 좋지 않은 환경에서 귀엽고 똑똑한 막내 여동색은 명랑했지만, 홍역이 걸리고 끝내는 죽고 말았다. 동생이 죽자 시내에서 더 한라산 가까이로 이사를 하였다.
동생의 죽음은 식구는 물론이지만 나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는데 학교시간 외에는 성곽을 넘어 산속을 헤메면서 마음을 달레고 하였다.
산속에는 여러가지 동물들과 식물들이 관찰의 대상이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곳에 앉으면 수평선이 둥글게 보이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수평선 가까이로 보이던 배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없던 배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는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로 높이 쌓은 성곽, 밭과 밭의 돌담 사이를 다람쥐처럼 쏘다니던 나는 항상 호기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 밤이면 양식을 구해 공비들이 마을을 내려오곤 했는데 낮에 꿩을 따라 밭을 달리다 보면 밀대나 보릿대가 쓰러져 있는 곳에는 공비들이 흘리고 간 무기용 낫이나 갈고리가 흘려져 있었다.
목마른 나는 샘물로 목을 축이려 했지만 뱀이 먼저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그 놈이 유유히 사라진 다음에야 마셔야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퍼부으면 계곡은 갑자기 강이 됐고, 나는 물줄기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쩌다 물가에서 진흙으로 탱크나 군함,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하면 해가 질 때까지 수없이 만들어댔는데 어른들은 이렇게 많은 무기가 있었더라면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군함을 본 인상은 특별했다. 어떻게 강철로 그렇게 큰 거대한 철선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철이 물 위에 뜰 수 있는가 해서였다.
이런 식의 여러가지 전쟁의 체험들은 나의 어린시절 동심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전쟁을 통해서 한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는 못했지만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인간의 선과 악이 치열하게 접전하는 사건 속에서 인간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얼마나 인간의 자연을 황폐하게 하며, 전쟁물자와 무기들을 통해서 새로운 문물을 느끼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문화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항상 새로운 예술에 대해 도전을 꿈꾸는 전위예술가가 된 것도 이러한 유년시절의 체험 때문이 아닌가 한다.